1. 총평
이 책을 통해 금융위기 이후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시장의 작동 방식과 주류 경제학의 전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시장이 항상 효율적으로 가격을 발견한다는 믿음은 위기 국면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동성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금융 시스템에서 유동성을 핵심 변수로 바라본다. 은행은 신용 창출을 통해 유동성을 무제한으로 공급할 수 있지만, 반대로 유동성 부족은 금융시장을 급격히 붕괴시킬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금융위기를 단순한 외생적 충격이 아니라 시스템 내부의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결과로 이해하게 만든다. 또한 가계부채에 의존한 성장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실질임금과 같은 보다 건전한 기반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서브 프라임 위기를 계기로 주류 경제학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책은 위기 이후 주류 경제학의 한계가 더욱 분명해졌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정부의 역할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던 시기보다 훨씬 확대되었고 재정 건전성만을 강조하던 논조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저자가 후기에서 언급하듯, 과거에는 정부 재정 적자를 경계하던 주류 경제학자조차 이제는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 정책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주류 경제학의 이론이 교리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하나의 이론이 모든 경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기존 이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시각을 통해 현실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중요한 대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계기로 앞으로도 다양한 경제학적 관점과 논쟁을 지속적으로 접해 보고 싶다.
2. 비주류 경제학의 특징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핵심 원리는 어떤 제약하에서의 극대화 원리다. 신고전학파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가설이나 이론이 유도되는 전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고전학파 이론의 전제는 도구주의적 인식론(instrumentalist epistemology), 방법론적 개체론(methodological individualism), 제약 없는 합리성(unbounded rationality) 혹은 실체적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 그리고 재화의 희소성에 기초한 교환경제(exchange economy) 등이다.
반면 비주류 경제학은 실재론(realism), 유기체론(organicism) 혹은 전체론(holism), 절차적 합리성(procedural rationality), 생산경제(production econmy) 등을 강조한다. 여러 방법론 학자들과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거의 동일하게 신고전학파와의 차이를 주장하고 있다.
3.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특징
한편 포스트 케인지언이 다른 비주류 경제학과 구분되는 특성도 관찰된다. 본질적 특징으로는 유효수요(effective demand)와 역사적 시간(historical time)이 있으며 모든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경제학 이론은 이 특징에 기초하고 있다. 유효수요의 원리에 따르면 경제는 단기뿐만 아니라 장기에서도 수요 결정적이며 공급은 수요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균형 상태가 경제의 이행 경로와 무관하지 않으며 역사적 시간을 경제 분석에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다섯 가지 보조적 특징을 지니는데 앞에서 말한 본질적 특징의 결과로 도출할 수 있다. 이들은 가격 신축성의 부정적 효과, 화폐 생산 경제(monetary production economy)의 존재, 근본적 불확실성(fundamental uncertainty), 타당한 미시경제학, 이론화에 대한 다원주의적 접근 등이다.
포스트 케인지언 학파에는 세 조류가 있다. 근본주의자는 주로 케인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익체감의 법칙과 같은 신고전학파의 특정 이론을 수용한다. 스라파학파는 마르크스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다부문 생산 체계에서 기인하는 상호 의존, 기술 선택, 상대가격의 분석 등에 관심이 많다. 마지막으로, 칼레츠키학파는 비교적 절충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중범위경제적(mesoeconomic) 금융 문제 외에도 가격 결정 과정을 다루는 미시경제학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4. 비주류 미시경제학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소비자 선택이론에는 일곱 가지 원리가 있다. 절차적 합리성에 따르면 소비자의 선택은 대부분 자의적이며 습관의 결과일 뿐이다. 필요의 포화성이란 주어진 임계점을 넘으면 재화의 증가가 추가적인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필요의 분할성이란 소비자는 필요와 지출을 여러 범주로 분류하며, 이 범주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필요의 종속성에 따르면 필요는 흔히 위계화되며, 필요의 성장에 따르면 필요의 위계 구조 내에서 시간과 소득의 증가에 따라 하나의 필요에서 다른 필요로 이동한다. 의존성이란 필요가 평판, 유행, 문화 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이며, 마지막으로 계승성이란 현재의 선택은 과거의 선택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포스트 케인스학파에서 시장의 가격은 시장력이 아니라 기업에 의해 결정된다. 지배적 기업이 정하는 가격이 나머지 기업들이 따르는 기준이 된다. 기업은 지배력 확대를 위해 성장을 추구하고 이윤은 성장 극대화라는 목적을 제약하는 금융적 요구 조건을 해결해 준다.
포스트 케인스학파에서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체 가능성을 부정하고 기계의 대수 및 노동자 수와 기업의 산출량 사이의 비율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또한 기업은 일반적으로 완전 가동 생산능력보다 낮은 수준에서 생산한다. 수요에 따른 유연한 대처를 하기 위함이다.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가격 이론은 비용 할증 가격 결정(cost-plus pricing)에 기초한다. 기업의 가격 결정 담당 부서는 단위 비용에 목표 수익률을 반영한 비용 마진(costing margin)을 덧붙인다. 기업의 단위 비용은 단기적으로 수요 변화에 관계없이 일정하다. 목표 수익률을 결정하는 요소에는 노사 각각의 교섭력, 독점도 및 기대 금리 등이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논의는 인플레이션 이론에서 분명한 함의를 갖는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는 총수요의 증가가 비용과 가격의 상승을 유발한다고 설명하지만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완전히 부정한다.
5. 거시경제적 화폐순환
포스트 케인스학파 화폐분석의 기초는 내생적 화폐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앙은행은 화폐 공급을 임의로 결정하지 못하고 화폐 공급량은 은행신용에 대한 수요와 대중의 선호에 따라 결정된다.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화폐 공급이 그 경제의 필요와 독립적이지 않다고 본다. 즉 대출이 예금을 창출한다는 의미다. 은행은 대출을 늘리기 위해 예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대출 시 요구되는 것은 차입자의 적절한 담보물 제공 능력과 신용뿐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중앙은행은 본원통화량을 재량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이때 본원통화량이란 신용 제수(credit divisor)를 통해 은행화폐량을 신용 제수로 나눠 얻어지는 값이다. 이러한 시각은 기업이 실행한 투자가 저축을 창출하고, 인플레이션은 화폐 공급의 과다한 증가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중앙은행은 항상 수요에 대응해 본원통화를 민간은행 시스템에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화폐 공급곡선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대신 포스트 케인스학파에서는 기준금리가 외생적이라고 주장한다. 중앙은행이 테일러 준칙에 따라 금리를 결정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리 결정은 중앙은행의 재량에 달려 있다.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신용의 공급 역시 내생적이라고 주장한다. 은행은 기업의 신용 요구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일 뿐이다. 특히 개방경제에서 대외 불균형이 있음에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외생적으로 결정해 시장 금리를 조절할 수 있음을 보이고 있다.
6. 단기분석: 유효수요와 노동시장
유효수요는 고용이론의 핵심 요소이다. 칼레츠키에 따르면 투자는 현재 산출량과 독립적인 변수이며, 임금에서의 소비가 유발지출이고, 이윤에서의 소비는 과거에 실현된 이윤에 의존하므로 독립변수라고 한다. 정부 부문이 없는 폐쇄경제에서 명목 소득 Y는 임금과 이윤의 합으로 구성되고, 다시 소비와 투자를 더한 값으로 쓸 수 있다.
Y = 임금 + 이윤 = 소비 + 투자 = 임금 소비 + 이윤 소비 + 투자
노동자들이 모든 소득을 소비한다면 임금 소비 = 임금이 되므로, 다음과 같은 이윤 방정식이 도출된다.
이윤 = 이윤 소비 + 투자
이윤 방정식에 따르면 정부 부문이 없는 폐쇄경제에서 노동자가 저축하지 않을 때 거시경제적 이윤은 민간 부문의 투자와 자본가의 이윤 소비를 합한 값과 일치한다.
이 식의 함의는, 자본가가 특정 기간에 소비와 투자를 늘리는 결정을 할 수는 있어도 이익을 늘리는 결정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을 늘리는 결정은 투자와 소비에 대한 자본가의 결정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칼도의 유명한 격언으로 정리하자면, "자본가는 자신이 소비하는 것을 벌지만, 노동자는 자신이 버는 것을 소비한다".
칼레츠키학파에 따르면 시장은 낮은 실질임금, 낮은 산출량, 낮은 고용 수준의 균형 상태로 경제를 내몰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지속적인 국가 개입을 통해 높은 완전고용 수준 근방에서 경제가 유지되어야 실질임금이 높아져 보다 높은 경제수준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
7. 장기분석: 성장이론
포스트케인스학파의 모형에 따르면 저축성향의 하락이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절약의 역설이 장기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TINA의 가장 기본적 교리 중 하나와 상반되는 점이다. 포스트 케인스학파에 따르면 절약은 경제를 정체시키고 낮은 이윤율을 유발할 뿐이다.
비용의 역설 또한 발생한다. 즉 실질임금이 상승해 생산비용이 증가하면 장기 이윤율은 높아진다. 다시 말해, 각 개별 기업의 총비용 마진이 감소하면, 경제 전체의 이윤율은 증가하는 것이다. 다른 조건들이 일정할 때 한 기업만이 실질임금을 올리고 총비용 마진을 줄이는 경우 확실히 이윤이 감소하고 이윤율은 하락한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총비용 마진을 줄이는 경우에는 경제 전체의 가동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거시경제적 이윤율은 상승한다.
비용의 역설과 절약의 역설은 표준적 칼레츠키학파 성장 모형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두 역설은 TINA의 주장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무엇보다 개인행동의 거시경제적 귀결을 무시한 채 미시경제적 시장 내부에서의 개인행동에만 초점을 둔 신고전학파 경제 분석의 단점을 분명히 드러낸다는 데 있다.
칼레츠키학파 모형은 실질임금과 이윤율이 필연적으로 상반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노동자와 기업가 사이의 협력이 전체 경제에 유익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임금이 상승하면 이윤이 증가한다. 따라서 자본축적은 바로 임금 주도적이라는 핵심 주장을 도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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