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산업의 본질은 더 이상 추상적인 소프트웨어 경쟁이 아니라 막대한 연산 자원과 전력을 확보해야 하는 거대한 물리적 장치 산업으로 변화했다. 알고리즘과 지능은 상향 평준화되어 복제되기 쉽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반도체 칩, 전력망, 송전 인프라는 단기간 내 복제할 수 없는 국가적 희소 자산이다. 우리나라는 전력망을 안보 인프라로 격상하고 대규모 연산 클러스터를 구축함으로써 지능을 수입하는 나라가 아닌 지능을 생산하는 패권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김용범 정책실장의 페이스북 글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집어삼킨다”는 말을 믿어왔다. 플랫폼과 알고리즘이 가치를 독점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AI는 그 문법을 바꾸고 있다. 이제 경쟁력은 코드의 세련됨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연산 자원과 전력을 확보했는가에 달려 있다. AI는 더 이상 추상적 소프트웨어 산업이 아니다. 거대한 장치 산업, 다시 말해 ‘물리의 산업’이다.
1. 가치 사슬의 이동: 지능보다 인프라
최근 벤처투자자 ‘Marc Andreessen’는 이렇게 말했다. “AI 가치의 중심이 소프트웨어에서 칩과 에너지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독창적인 서비스 설계와 네트워크 효과가 기업 가치를 만들었다. 지금은 다르다. 모델 성능은 결국 얼마나 많은 연산을 투입했는가에 좌우된다. 알고리즘은 빠르게 공유되고, 기술 격차는 금세 좁혀진다. 하지만 대규모 인프라는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 이제 희소한 것은 코드가 아니라 GPU, 메모리, 전력, 송전망 같은 물리적 자원이다.
2. 앤스로픽의 역설: 지능이 흔해질 때
’Anthropic‘의 모델은 발표 때마다 성능 도약을 보여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유사한 수준의 모델이 등장한다. 실리콘밸리의 신생 스타트업들이 공개하는 모델은 물론, 중국의 ‘DeepSeek‘와 ’Moonshot AI’의 성과만 봐도 모델 성능 격차가 얼마나 빠르게 좁혀지는지 알 수 있다.
지능은 점점 범용화되고 있다. AI 기업의 비용 구조를 보면 더 분명하다. 연구개발비보다 전기료와 칩 사용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조다. 지능이 흔해질수록, 결국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그 지능을 돌리는 칩과 전력이다. AI는 예술적 알고리즘 경쟁이 아니라 자본과 물리 인프라의 체급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
3. 한국의 분기점: 우리는 무엇을 수출하는가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생산 능력을 갖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HBM 분야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칩을 파는 나라인가, 아니면 연산을 생산하는 나라인가? HBM이 NVIDIA GPU에 실려 해외 데이터센터로 향할 때, 정작 국내에서는 대규모 AI 연산 클러스터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에 전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AI가 요구하는 규모와 속도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느냐다. 발전 설비의 총량 확대는 물론, 송배전망과 입지, 인허가 속도까지 함께 풀어야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요리 기구를 만들면서 정작 우리 주방에서는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4. 칩의 패권: 병목을 쥐는 나라가 이긴다
HBM 경쟁력은 강력한 자산이다. 그러나 설계와 가속기 생태계가 해외에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는 가치 사슬의 일부만 통제하게 된다. 진짜 전략은 단순한 부품 공급을 넘는 것이다.
• 메모리
• 첨단 패키징
• AI 가속기 설계
• 대규모 연산 인프라
이 가치사슬의 핵심 지점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
우리가 빠지면 전 세계 AI 연산이 느려진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 비로소 실질적인 협상력이 생긴다. 칩은 이제 단순 부품이 아니라 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 자산이다.
5. 에너지 아키텍처: 전력망은 안보다
AI 성능은 빠르게 발전한다. 그러나 전력망과 송전 인프라는 10년 단위로 움직인다. 이 간극이 문제다. 데이터센터 한 곳은 중소 도시 수준의 전력을 소비한다. 수 GW 단위 전력 수요는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인프라 문제다. AI는 전기를 소모하는 산업이 아니라, 전력을 고부가가치로 전환하는 산업이다.
전력망은 더 이상 지역 민원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 전략 인프라로 격상되어야 한다. 지산지소 원칙을 분명히 하고, 전력 생산 지역이 산업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송전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체계는 법과 제도를 넘어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실행력을 갖춰야 한다. 보상과 갈등 관리가 제도 문구에 머물지 않고 신뢰를 만드는 구조로 작동해야 한다. 서해안 HVDC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와 거버넌스의 문제다. 정부·한전·참여 기업이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상설 체계를 운영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명확하다. 전력망을 안보 인프라로 보고 국가 재정을 투입하고, 민관 협력을 제도화하며, 안정적 운영을 책임질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일이다. 전기가 흐르지 않으면 미래도 멈춘다.
6. 결론: 지능은 복제되지만, 인프라는 복제되지 않는다
지능은 빠르게 공유되고 복제된다. 모델은 추격된다. 코드는 퍼진다. 하지만 발전소와 송전망, 반도체 공장은 하루아침에 복제되지 않는다. AI는 더 이상 기술 정책의 일부가 아니다. 산업, 에너지, 재정, 국토 전략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문제다.
대한민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계속 지능을 수입하는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칩과 전력을 전략 자산으로 삼아 지능을 생산하는 나라로 도약할 것인가. 12차 전력공급기본계획과 전력산업 구조개혁은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지능 수입국’으로 남을지, ‘지능 생산국’으로 도약할지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참고:
- 김용범, 《AI는 이제 ‘코딩’이 아닌 ‘전기’의 전쟁이다》, Facebook, 2026. 2. 18.(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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