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역사

자크 타르디,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1918》, 2014

econtopia 2025. 12. 28. 22:01

 

대중문화의 관심에서는 다소 비켜나 있는 제1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만화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전쟁의 모습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한 채 서로를 향한 적대적 공방만을 주고받는, 과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공전의 연속이다. 프랑스군과 독일군이 마주한 전선 사이에는 무인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양측은 무인지대를 주시하며 경고 사격을 주고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참호전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참호전이란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서 포격에 대비하는 전투 양식을  있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결국 상대를 결정적으로 돌파하지 못한 채 전쟁이 장기화되고 끝나지 않았던 제1차 세계대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만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전쟁에 참여한 개개 군인들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조명함으로써 그 당시의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전달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병사들 대부분은 조국을 지키겠다는 대의보다도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휘말려 각종 사건과 비극을 겪게 되는 각자의 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보는 것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쟁이 진행되면서 인간성과 전쟁에서의 승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전쟁의 잔혹함도 선명하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적의 공격을 피해 참호로 후퇴한 중대에 대해 포병대가 사격을 가하는 장면에서 적 앞에서 후퇴했다는 이유만으로 아군에게까지 포격을 명령하는 장교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 인간성을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보여준다.

 

책의 마지막에서는 시체 위에 구축된 진지에서 각종 위생 문제에 시달리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병사의 모습 위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다는 짧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던 전쟁의 실상을 개인의 시선에 집중해 그려냄으로써 죽임이 일상이 되어버린 끔찍한 현실을 독자로 하여금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

포탄이 고통받는 땅의 배를 갈라놓았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땅을 파헤쳐 숨을 곳을 만들어 지냈다.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인간은 양떼와 같다. 그래서 군대와 전쟁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그 어리석은 온순함 때문에 죽는다.(가브리엘 슈발리에, 《공포》)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해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지에 대해 분노하고 역겨움을 느꼈다. 양 진영 모두 한 치의 땅도 더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