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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영, 《5분 뚝딱 철학-생각의 역사》, 2024

econtopia 2025. 8. 11. 22:57

1. 손색없는 철학 개괄서
《5분 뚝딱 철학-생각의 역사》는 철학의 분과를 플라톤의 영혼 3분설에 따른 진, 선, 미 세 개의 주제에 맞춰 시간에 흐름에 따라 서양철학을 개괄하는 책이다. 다양한 주제를 조금씩 소개하면서 적당히 맛만 보게 한다는 점에서 마트의 시식코너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읽으며 관심이 갔던 주제는 더 깊게 알아볼 생각이다.
 
2. 철학을 하는 방법
철학을 하는 쉬운 방법은 철학자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것이다. 철학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철학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전체적인 숲을 알아야 한다. 즉 철학사 지도를 그려야 한다. 철학의 분과는 크게 3개의 틀로 나눌 수 있다.
 
큰 틀에서는 진(이성, 지성), 선(의지, 도덕), 미(욕구, 욕망)로 나눌 수 있다. (1) 이성과 지성에 관한 것으로는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 과학철학, 수학철학, 언어철학이 있다. (2) 의지와 도덕에 관한 것으로는 윤리학, 종교철학, 정치철학, 심리학이 있다. (3) 욕구와 욕망에 관한 분과로는 미학이 있다.

 

아래 내용은 주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3. 고대, 중세, 근대

3.1.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이 있다고 봤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인의 능력을 탁월하게 수행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봤다. 본인의 능력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상태를 아레테(덕)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지키는 것을 반복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습관이 되면 그것이 바로 덕이라고 했다.

 

3.2. 중세의 보편논쟁

중세의 보편논쟁은 3세기 무렵 시작되어 15, 16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보편자가 실재하는지, 즉 개별자인 개인 말고 '인간'이라는 보편자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다투는 것이 보편논쟁이다. 보편논쟁은 일종의 정치적 권력투쟁이었다. 중세 보편논쟁의 실재론자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아담은 보편인간이기 때문에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가 된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간은 죄를 씻고 구원받을 가능성을 얻었다. 보편논쟁의 실재론자들은 마찬가지로 예수가 보편인간이라고 본다. 보편인간이 존재해야 인간이 원죄를 가지게 되고 예수가 인간을 구원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편논쟁의 실재론이 옳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실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이 '보편자론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믿는 믿음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3.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5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담긴 내용은 오늘날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도덕과 종교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기술적, 공학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는 사자처럼 힘이 있어야 하고 여우처럼 간계를 부릴 줄도 알아야 한다. 도덕적으로 선한 군주가 좋은 군주가 아니라 더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군주가 좋은 군주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을 과감하게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고 한반도룰 두고 강대국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간계라는 마키아벨리의 지혜일 수도 있다.

 

3.4. 칸트

칸트를 모르고는 서양철학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칸트는 플라톤의 전통에 따라서 세 권의 책을 썼다. 진리에 관한 《순수이성비판》, 의지에 관한 실천이성비판,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력비판이다. 

 

3.4.1.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한계를 긋겠다는 목적으로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했다. 칸트는 인간이 경험하지도 않고 어떻게 지식을 담고 있는 종합적 판단을 하는지 궁금해했다. 우리는 수학, 기하학, 물리학 지식을 직접 경험해 보지도 않고 참인 줄 안다. 칸트는 이 문제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해결했다. 칸트는 '사물'이 아니라 '대상(對象)'이라는 말을 썼다. 대상으로부터 감각자료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구조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칸트의 인식론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둘 다 받아들인다. 칸트는 이성과 경험 중 하나가 없으면 온전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봤다. 칸트의 인식론을 붕어빵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하기도 한다. 밀가루 반죽과 감각자료는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경험'이고 붕어빵 틀과 인식의 틀은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이성'이라고 보면 된다. 칸트는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유한한지, 우주는 유한한지,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등의 질문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고 봤다. 이것에 관한 지식은 경험 없는 지식, 즉 밀가루 반죽 없이 붕어빵 틀만 구운 셈이다.

 

3.4.2.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인간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에서 착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칸트는 원래 옳고 그른 것이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것을 주지주의라고 한다. 또 도덕법칙으로 정언명령을 제시했다. 정언명령이란 어떤 조건이건 간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라야 하는 도덕법칙을 말한다. 칸트가 제시한 정언명령 중 하나는 "자기 행위의 원칙이 보편법칙과 일치하도록 행위하라"이다. 보편법칙이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지켜야 하는 법칙, 객관적으로 타당한 법칙이다. 
 
칸트는 착하게 살면 행복해지는 것을 최고선이라고 봤다.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최고선은 바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은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훗날 혹은 현세를 떠난 이후에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것이다. 먼 훗날에라도 신이 주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영혼이 존재해야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 영혼, 자유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신이 도덕적으로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칸트가 "신을 앞문으로 내쫓고 뒷문으로 들여보냈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윤리학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지향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칸트가 꿈꾸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의무를 지키면서 행복해지는 사회였다.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마땅한 섭리를 널리 퍼뜨리고 싶었던 마음이 느껴진다.

 

3.4.3. 칸트의 판단력비판
이제 예술을 다룬 판단력비판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사실의 세계를 말하고 실천이성비판》에서 당위의 세계를 말했다. 칸트는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 즉 예술이라고 봤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현실을 본다. 그런데 과학을 통해 신의 세계, 초월적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다. 사실의 세계에서 초월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심연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상상력이란 '개별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보편적인 것에 포섭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상상력은 바로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 즉 예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 대상의 합목적성을 본다는 뜻이다. 어떤 대상이 합목적적이라는 건, 그 대상이 신이 창조한 목적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신의 목적, 계획을 힐끔이나마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신이 거주하는 세계, 즉 초월적 세계, 당위의 세계, 도덕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숭고의 감정을 통해서도 초월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칸트는 쾌, 불쾌의 감정을 기준으로 아름다움과 숭고를 구분한다. 그리고 숭고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별한다. 이 3가지 종류는 우리의 인식 능력과 관련이 있다. 우리 인식능력에는 지성, 상상력, 이성이 있다. 지성은 대상을 우리 머릿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의 틀에 적용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어 대상에 부여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어떤 대상을 하나의 통일된 체계 속에서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아름다움의 감정은 쾌와 관련이 있다. 한편 숭고에는 쾌와 불쾌가 동시에 있다. 수학적 숭고는 거대한 자연을 포섭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쾌함이 쾌라는 감정으로 바뀌면서 생긴다. 역학적 숭고는 두려운 감정이 쾌라는 감정으로 바뀌면서 생긴다. 또한 아름다움은 지성을 기본으로 상상력이 자유로운 놀이를 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반면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이 좌절하면서, 동시에 이성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우리가 폭풍우를 보며 숭고함을 느끼는 것은 폭풍우 자체가 숭고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압도적인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 숭고하기 때문이다. 숭고한 것은 폭풍우가 아니라 폭풍우에 맞서는 등대다. 칸트는 이 등대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도덕적 감정이라고 봤다. 그리고 인간은 도덕적 감정을 통해 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압도적인 힘에 굴복해 공포에 빠지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에 맞서 내 안에 있는 도덕적 감정을 일깨워야 한다. 두려움을 직시하고, 나의 정신이 위대하고, 나 자신에게 도덕적 감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신에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3.5.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는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했다. 이때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말한다.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6시간 넘게 일해야 했다. 마르크스는 열악한 노동상황을 바꾸려면 학문과 예술, 법과 정치 등 상부구조가 아니라 생산관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순순히 빼앗길 리 만무하므로 마르크스는 무력을 통해 혁명을 해야 한다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외친다. 

 

마르크스 철학은 어느정도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뉴턴의 물리학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거의 폐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은 여전히 뉴턴이 만든 구도 속에 있듯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 많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그의 분석은 후에 수정 자본주의의 형태로 나타났고, 복지국가의 형태로 나타났다. 결코 과거 철학자의 유산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4. 현대

4.1. 니체, "신은 죽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쌓아올린 서양 전통의 철학과 도덕은 니체에 의하여 전복되었다. 비로소 현대철학의 새로운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니체는 도덕적 관념의 기원에 관심을 가졌다. 즉, 왜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를 도덕의 계보학이라고 한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노예는 주인을 '악'으로 생각한다. 노예는 자신을 '선'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주인은 노예를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에게는 단지 좋음과 나쁨이 있을 뿐이다. 니체는 기독교 때문에 우리가 노예의 도덕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은 허구이며 왜곡된 도덕이기 때문에 인간은 주인의 도덕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적 가치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을 죽여야만 한다. 이때 신의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노예의 도덕이 없어지고 '좋음과 나쁨'만을 갖는 주인의 도덕이 다시 새로운 가치체계가 되었다는 것은 곧, 서양 전통의 모든 도덕과 가치가 죽었다는 의미와 같다.

 

'아모르 파티'는 자기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 위버멘쉬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발적 아싸 정도가 될 것 같다. 기존의 도덕과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니체는 운명을 사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4.2.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고 했다. 인간은 태어난 목적, 기능 혹은 가치가 없고 그냥 실존하는 존재자일 뿐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그의 생각이 여실히 잘 나타나는 설명이다.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다. 그런데 이런 자유는 부담스럽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의 선택은 바로 보편적 인간의 선택이다. 내가 만든 가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의 가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을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한다. 계약, 구속이라는 뜻이다. 앙가주망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사회적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이다.

 

4.3. 존 롤스의 복지형 자유국가

존롤 스에 따르면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에서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규칙을 세워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절차적 정의가 보장될 수 있다. 롤스에 따르면 세상은 불가피하게 불평등하다. 하지만 복지와 기회의 균등을 통해 정의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라고 한다.

 

롤스에 따르면 개인 능력은 '사회적 자산'이다. 성공한 사람은 제때에 제 위치에 태어났기 때문이고 그들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룬 부와 업적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 되는 것이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은 항상 자신이 성공한 이유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대부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한 이유도 아마 그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인 듯하다.

 

4.4. 게티어, "지식이란 무엇인가?"

에드먼드 리 게티어는 단 3쪽의 논문만으로 철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제기한 문제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지식인가?'였다. 소위 JTB(Justified True Belief) 조건이라고 불리는 이 조건은 플라톤이 어떤 명제가 지식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한 것이고 이 정의는 2500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런데 게티어는 JTB 조건을 만족함에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례가 있다고 주장한다.

 

후에 많은 철학자가 JTB 조건을 수정하거나 추가로 조건을 제시하려 했음에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리고 게티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식의 정의를 왜 따져야 하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철학은 어떤 개념을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이므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지식을 습득하고 있지만 정작 지식의 정의는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참 아이러니한 주제인 것 같아 기록해 둔다.

 

4.5. 현대철학의 두 줄기, 분석철학과 현상학

근대 이전까지 '모든 학문의 왕'이었던 철학은 과학혁명 이후에 철학적 문제가 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하기 시작하면서 위축되기 시작했다. '영혼의 문제'는 심리학자들이 다루기 시작했고 '만물의 근원 문제'는 물리학자가 논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사회 문제는 정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이 가져갔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철학의 두 가지 큰 줄기는 분석철학과 현상학이다. 분석철학은 언어를 분석하고 논리적 방법론을 통해 철학을 하는 학파다. 현상학은 자신의 의식이 나타나는 것을 직관하는 방식으로 철학을 하는 학파다.

 

4.6.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의 토대를 닦은 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철학은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으로 구분한다. 전기철학에 관한 책이 《논리철학 논고》이고, 후기 철학에 관한 책이 《철학적 탐구》이다.

 

4.6.1.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들이 자기들만의 유희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신세와 같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선 언어의 미사어구를 빼고 의미를 명료하게 다듬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구조와 언어의 구조가 동일하기에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보여준다고 봤다. 이처럼 언어와 세계가 대응된다는 이론을 그림이론이라고 한다. 그는 '착한 게 좋은 것인가' 따위의 물음은 헛소리라고 한다.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 윤리학에서 말하는 신, 도덕, 자유와 같은 개념이 모두 말할 수 없는 것, 그냥 헛소리라고 봤다. 

 

비트겐슈타인은 비과학적인 영역의 명제를 난센스라고 말하긴 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봤다. 세계 안에 있는 것은 수학, 논리학, 과학이고 세계 밖에 있는 것은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 예술이다. 그 차이를 부각한 것일 뿐이다.

 

4.6.2.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중간에 크게 바뀐다. 그는 언어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입장인 언어 용도 이론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서 언어와 세계는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에 본질적인 의미는 없다고 주장한다. 마치 한 가족을 규정하는 본질 같은 건 없고, 단지 부분적으로 닮은 가족 유사성이 있을 뿐이다.

 

정리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철학에서 '언어 그림이론'을 내놓았다.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봤다. 따라서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본질적인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후기 철학에서는 '언어 용도이론'을 내놓았다. 언어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세계는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에 본질적인 의미 따위는 없다.

 

4.7.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

현상학의 창시자는 에드문트 후설이다. 후설이 활동하던 19세기 유럽의 학문에는 모든 분야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경향성이 있었다. 후설은 이러한 경향이 학문은 물론 문화 전반에 위기를 가져올 것으로 봤다. 후설은 인간의 정신, 의식, 내면을 직접 탐구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후설은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환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상학적 환원을 하기 위해서는 (1) 판단을 중지하고(에포케), (2) 가정/전제를 제거하고, (3) 이 상태에서 경험을 기술해야 한다. 현상학적 태도란 우리의 일상적 사유로는 포착하지 못했던 대상의 본질을 자신의 순수한 의식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즉 현상학적 태도를 가지는 건, 초월적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모든 가정과 전제를 제거하고 그 안에서 순수의식을 찾아내자고 한다. 그런 순수의식을 통해 철학을 다시 엄밀한 학문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4.8.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는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고 봤다.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단어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만물의 영장이라는 선입견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인간' 대신 'Da-sein'이라고 부르자고 한다. 우리말로는 '거기-있음', 즉 '현존재'라고 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긴 의미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인간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형성된 일종의 의미체계라고 봤다. 현존재는 그러한 세계와 관계를 맺을 때에만 비로소 현존재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신을 던질 수 있다고 봤다. 만약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그제서야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뭔지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똑바로 보고 나서야 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이렇게 묻곤 했다고 한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우리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타인의 삶을 사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우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자라고 봤다는 점에서 사르트르의 철학과 유사하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사르트르의 철학과 같이 무신론적 실존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존재론이라고 한다. 실존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실존을 통해 존재를 규명하는 것을 중시했다면서다.

 

4.9. 질 들뢰즈의 리좀형 사유방식

질 들뢰즈는 200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라고 한다. 들뢰즈는 나무형 사유방식이 아니라 '리좀형 사유방식'으로 세계를 보자고 한다. 리좀형 사유방식은 사물의 성격이 다른 사물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이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한다. 그는 욕망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산하려는 긍정적인 힘으로 봤다. 이때 욕망은 개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운동을 하면서 뭔가를 생산하는 우주의 근본적 운동원리라고 봤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철학적 개념이 접속하면서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발전 과정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이 생각을 확장해 보면, 내가 어떠한 화두를 꺼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 쌓여온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필요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5. 후기

철학자들은 존재, 도덕, 윤리 등 여러 질문에 대한 본인만의 답을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가설을 내놓지만 과학으로 규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그 주장의 참과 거짓을 영원히 가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의 생각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각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 다르다. 철학의 가장 큰 가치는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고,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논리적 사고에 있다. 비록 결론이 확정적이지 않더라도, 논리성을 갖춘 철학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이 책은 서양철학을 개괄하는 데 있어 훌륭한 안내서이지만 각 철학자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이 책을 통해 스쳐 지나간 철학자들을 이제는 더 깊이 있게 탐구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