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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스, 프라이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 1999

econtopia 2025. 11. 3. 22:22

1. 책 소개

이 책의 저자 두 명은 각각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다. 두 사람은 이 책을 통해 신학적 차이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를 신이라 믿었던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2. 기독교의 유대교적 근원

기독교는 하느님이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들인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에게 주었던 약속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적인 기원을 가진 종교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손자 야곱이 유대인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우르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이동했다. 하느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었고, 이때부터 유대 민족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리게 됐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 이후 이스라엘인들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했다.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지만 12개의 지파로 나뉘었고, 그중 유다 왕국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유다 역시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제 에즈라가 영적 개혁 운동을 주도하며 유대교가 형성됐다. 이때부터 유대인은 이스라엘인과 구분되는 독자적 종교 공동체로 발전했다.

 

베들레헴이라는 미지의 마을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태어난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예수 나이 약 30세부터 시작된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3년 동안 팔레스타인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하고 사역했다. 유다를 제외한 예수의 제자들은 이 땅에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쳤는데, 그곳은 "위와 아래가 뒤바뀐 나라"였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된다. 그러나 사흘 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다. 이후 제자들은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선언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켰다. 바울은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 복음을 전했고,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바울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기독교를 수립하는 데 예수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3. 기독교 제국의 형성과 확장

기독교는 초기에는 보수적인 로마인들의 반감을 샀으나, 가족애와 자선을 중시하는 공동체적 성격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교회는 인종과 계급을 초월해 모두를 환영했고 신앙의 통일과 삼위일체 교리 확립은 기독교의 내적 결속을 강화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2세기 반이나 지속된 끝에 311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예배가 허용됐다. 콘스탄티누스는 첫 기독교 황제로서 새로운 주교들에게 원로원에 버금가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교회를 제국 체제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면서 로마의 주교는 서방의 권력자가 됐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4세기 들어 신도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교회의 위상도 커졌다. 황제의 건축가들은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교회 건축에 도입했고 이 양식은 이후 전통적인 교회 건축의 근본 구조가 됐다. 그러나 교회는 정통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국가 권력과 결탁해 강압적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는 기독교 역사가 피로 물들게 된 단초가 됐다.

산타 사비나의 바실리카(자료: Wikipedia)

 

4. 동서 교회의 분열

410년 로마는 고트인들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된다. 로마 행정 체계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점차 제국을 대신하는 보호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 무렵 서방에서는 교회가 영적으로 제국으로 독립했지만, 동방에서는 제국과 교회가 아직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동방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둘러싼 논쟁이 격해져 갔고 결국 동방 제국은 내적인 갈등으로 약해진다.

 

80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슬람교도 등 침략자에 의해 동·서의 왕래가 제한을 받으면서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가 멀어져만 갔다. 동방의 황제는 서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점점 잃어갔고 동방 기독교는 콘스탄티노플에 더 집중됐다. 서방에서는 교황과 서방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11세기 초 동서의 문화적, 종교적 차이는 문제가 될 정도로 커졌다. 동방은 1,000년 동안 헬레니즘 전통을 변함없이 계속 유지했으므로 라틴어를 알지 못했다. 서방에서는 그리스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로마가 여러 차례 야만족의 침략에 시달렸던 반면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계속해서 제국의 수도를 아름답게 번창시켰다. 동방과 서방은 정치적으로도 각각 다르게 성장했다.

 

1054년 상호 파문, 1204년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거치며 기독교 전통은 동서로 끝내 분열됐다. 동쪽 교회는 동방 정교회라고 불렸고, 서쪽 교회는 가톨릭 교회라고 불렸다. 이 두 공동체는 교리나 실천면에서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 발전해 오는 가운데 문화적으로 점점 더 분리됐다.

1054년 이후 동서로 분열된 기독교

 

5. 종교 개혁
16세기에 이르러 교회의 타락과 교황권의 남용이 심각해지자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성직 매매와 면죄부 판매 같은 비도덕적 관습은 교회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그는 신학적으로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과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테제를 주장하며, 구원은 신앙을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성서를 모든 신자가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기독교인은 신앙의 사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명제들은 천 년 넘게 지속돼 온 교회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루터는 교회의 개혁을 넘어서 신앙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그는 성서에 명확하게 근거하지 않은 교리와 성인 숭배, 면죄부를 부정했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1526년 독일 제후들은 각자의 영토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인 성공회를 확립했다. 

종교 개혁이 끝난 후의 유럽

 

6. 계몽주의와 신앙의 부흥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권위를 탈중심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노력이 종교 개혁 이후 17~18세기의 철학자, 과학자로 하여금 세상과 인간의 일들을 세속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 됐다. 계몽주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세상을 신앙이 아닌 이성과 경험으로 설명하려 했다. 

 

계몽주의 시대 경험론과 합리론은 이신론(理神論)의 모습으로 교회 안에 들어왔다. 이신론이란 최상의 지적인 존재(신)가 우주와 우주의 자연스러운 법칙을 작동시켰지만 그는 인간사를 포함한 우주의 일상사를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신론자의 관심은 신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신이 피조물로 하여금 독립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던 창조의 법칙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영국 계몽주의의 아버지 존 로크, 과학과 수학에 큰 기여를 한 아이작 뉴턴이 대표적 이신론자이다.

 

이 시기에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나 영국 국교회의 침체를 타개하고 신앙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 시기에는 종교 부흥 운동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는 이중적인 시기였다. 찰스 디킨스의 말처럼, 이 시기는 "신앙의 시기이자 의심의 시기"였으며, 교회로서는 "최고의 시간인 동시에 최악의 시기"였다.

 

7. 공격받고 분열하고 번성하는 기독교

종교 개혁과 계몽주의의 영향은 19세기에도 계속됐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재정립됐다. 1776년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 즉 정교분리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신론자였으나, 기독교인과 이신론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독립선언서가 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언어를 선택했다. 그는 신성을 "자연의 하느님", "창조자", "세상의 최고 심판자" 등으로 표현했다.

 

한편 1798년 프랑스 혁명은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교회의 재산은 국유화됐고 기독교는 일시적으로 법으로 금지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기독교 내부에서는 자유주의적 신자와 보수주의적 신자 간의 대립이 심화됐다. 자유주의적 신자들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지지해 민주주의를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보수주의적 신자들은 급진적 사회 변화는 예외 없이 피의 혁명으로 귀결되며 결국 기독교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에서 이러한 의견 대립이 심화됐고 교황은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유럽의 기성 정치가들과 손을 잡았다. 1848년 유럽의 절반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에도 교회는 요지부동으로 억압하는 기성 정치가들 편에 서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의견 대립

 

19세기 후반에는 드와이트 L. 무디를 중심으로 한 복음 전도 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나면서 기독교가 다시 부흥했다. 1850년 이후 선교 활동은 전 세계로 확산됐으며, 기독교는 지구적 종교로 자리 잡았다.

 

8. 총평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시간이 흐르며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등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풍부한 삽화와 사진 덕분에 시각적으로도 이해하기 쉬웠다.

 

다만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이 다소 피상적으로 다뤄지고, 동방과 서방 교회의 교리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점은 아쉬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책을 통해 보충해야겠다.

 

종교 개혁 관련 부분이 흥미로웠다. 루터와 칼뱅은 종교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개혁은 정치 권력 강화에 이용됐다. 지방 귀족들은 종교를 통해 지역 내 영향력을 확대했고, 수많은 개신교 종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적 존재로 변모했다.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는 모습은 과거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기독교가 앞으로는 세계 평화와 불평등 완화, 그리고 박애의 정신을 실천하는 참된 종교로 나아가길 기대해 본다.